윤보선 대통령 생애

생애와 발자취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위해 창간한 주간지인
「진단」의 발간및 편집 활동을 하였다.

「진단」은 한국 독립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호소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잡지였다.

‘해위는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다.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열망에 해위는 상해로 떠났다. 거기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무창 신해혁명의 주도자였던 예관 신규식을 만났다. 예관은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지어주고 그의 인생의 사상적 스승이 되었다.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해위는 신규식의 곁에서 상해임시정부의 발족을 도왔고 신규식이 1920년에 만든 주간지『진단』의 발행에도 관여했다. 1919년에는 최연소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신규식의 신뢰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는 출범부터 재정난에 봉착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재정수입의 60%가 부정기적인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1년 1월, 해위는 이승만의 명을 받고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동생인 윤완선이 일본 유학 중이라 그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독립자금을 조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부친 윤치소 공은 선뜻 3,000원을 내주었다. 두 번째 독립자금이었다. 이미 그는 1919년에 게일 (Gale James Scarth) 선교사를 통해 2,000원 이상의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낸바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임시정부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 각 계보의 갈등이 내분화되어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윤보선을 미래의 지도자로 점찍었던 신규식과 이시영, 신익희가 영국 유학을 강권했을 때가 이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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